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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00년경부터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한 에게해 일대에는 이미 고도로 발달한 청동기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문명은 보다 더 앞선 오리엔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꾸준하게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중에서도 크레타는 전설적인 왕 미노스의 치세때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그 세력은 에게해 전역에 뻗쳐서 후세의 그리스인에게 미노타우로스의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오늘날 크레타의 문명을 미노아 문명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미노스왕때 크레타문명이 전성기를 이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레타인은 지모신을 비롯한 자연의 여러 신을 섬겼으며 왕의 최고의 제관으로 신권정치를 했다. 왕은 많은 관리와 서기를 거느리고 궁전에서 여러가지 일을 진행했으며 서기들은 그림문자를 개량하여 많은 기록을 남겼다. 아직까지 이 그림문자를 해독하지 못해서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미노타우로스 괴물을 가둬 두었다는 미궁이나 밀집돼 있는 도시의 유적을 보건대 크레타인은 세련된 도시생활을 즐겼음을 알수있다. 또한 그들이 남긴 궁전 벽화를 보면 자연에 대한 감각과 사실적인 묘사를 보이고 있어 오리엔트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의 양상이 움트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인도 유럽어족의 일파인 아카이아인이 발칸반도로 남하하기 시작하여 그리스로 들어왔을때 그곳의 원주민은 미노아 문명을 받아들여 에게 문명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카이아인들은 원주민과 별다른 충돌 없이 섞여 살면서 그 문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차츰 그 세력이 커지자 아카이아인들은 자신들의 북방적 문명을 혼합하여 다소 독자적이고 발전된 문명을 이룩했다. 그들이 세운 국가 중 가장 강대했던 것은 미케네 왕국이었다. 그래서 아카이아인들이 남긴 문명을 미케아 문명이라고도 부른다. 기원전 1400년경 급기야 아카이아인들은 크레타로 쳐들어가 이를 점령하고 크레타를 대신하여 에게해 주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트로이 전쟁의 에피소드도 이 전쟁의 이야기이다. 미케네 왕국은 미노아 문명과 마찬가지로 왕이 백성을 통치하는 오리엔트식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왕국도 기원전 1200년경에 남하하기 시작한 도리아인에게 멸망을 당했다. 도리아인은 자유로운 전사들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철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청동기를 쓰던 미케네보다 선진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오리엔트식 사회구조의 그리스 청동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미케네 문명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새로운 국가가 일어나고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서는 산맥으로 분리된 골짜기나 해안의 오목한 들판마다 폴리스라는 독특한 구조의 소국가가 나타났다. 이들 폴리스는 전사공동체인 동시에 자유로운 시민들이 혈연의식으로 맺어져 있는 공동체였다. 이들은 아크로폴리스라고 이름 붙인 언덕에 그들의 수호신을 모시고 있었다. 폴리스의 구성원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옆의 아고라라고 불리는 광장에 모여서 국사를 의논하고 누구나 공동생활의 모든 분야에 참여할수 있었다.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다시 그리스인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지중해 흑해연안 일대에 식민 활동을 전개하여 곳곳에 폴리스를 세웠다. 그리스 세계는 크게 확대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폴리스라는 작은 공동체의 확산이었을 뿐 정치적으로 통합된 대제국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스인은 언어와 종교가 같고 올림피아의 제전을 함께하고 멜피의 신탁을 믿음으로써 동족의식을 잃지 않는다는 민족적 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혈연적 유대로 맺어진 집단이라는 성격을 가진 폴리스는 시민의 충성심이 매우 강했던 반면에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어서 이방인을 시민으로 받아들이거나 다른 폴리스와 합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적 또는 군사적 목적의 동맹을 맺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수많은 폴리스로 나뉘어 살았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종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바로 그리스의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대규모의 제전이었다. 제우스를 모신 사원이 그리스 도처에 있어서 운동과 예술을 좋아한 그리스인은 제전때마다 사원에서 운동 경기와 문화행사를 벌였다. 그중에서 4년마다 열리는 제우스신전에서의 행사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행사였다. 이 제전은 그리스인만 참가할수 있었다 따라서 이제전은 그리스민족 연합의 중심이 됐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 독립의 기상을 장려하게 되었다. 제전은 5일간 계속됐으며 경기의 종류는 크게 나누어 달리기,투창,경주,씨름,원반던지기의 다섯 종목이었다. 이들 경기에서 이긴 자에게는 월계수로 만든 관이 수여됐는데 이때 사용된 월계수는 양친이 다 생존해 있는 아이가 금으로 만든 칼로자른 가지여야만 했다. 이처럼 월계관을 쓴다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대단한 명예였고 월계관을 쓴자는 신전에 마련된 특별한 잔치에 참가한뒤 고향으로 돌아가 큰 환영을 받았다. 이행사는 그리스가 멸망한 후에고 계속 이어졌으나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394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이 행사를 이교도들의 종교행사라 하여 금지시킴에 따라 정식으로 폐지가 되었다. 그러나 온갖 정치적인 관계를 배제하고 그리스 전체 폴리스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이 올림피아 제전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 인류의 형제애를 고취시키고 세계평화를 바라는 생각으로 근대에 부활된 것이 지금의 올림픽 경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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